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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필창
작성일24-01-11 10:02 조회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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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강남역은 어딜 가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유산호 없이 오랜만에 넷이서 가지는 술자리가 준형은 반가웠다. 유산호가 요즘 들어 자꾸 숨 막히게 군다. 자꾸 기어오르고 툭하면 삐친다. 아직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귀찮고 거슬렸다.

그러나 유산호와의 섹스는 최고였다. 처음엔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주제에 이제는 제법 허리에 다리를 감고 채근하기도 한다. 갈수록 물이 올라 질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앙탈은 받아주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준형의 성격으로는 지금까지 참아준 것도 용했다. 석준과 시시한 장난을 치면서 골목 안쪽을 걷는 준형의 기분은 동물원을 탈출한 사자처럼 상쾌했다.

“아 나 담배 사야 된다. 편의점 좀.”

“어, 나도. 준형이 너는?”

준형은 대답 대신 후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몇 발짝 뒤에서 걸어오던 성경이 준형의 옆에 멈춰 섰다. 성경은 석준과 동진이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보고 있던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준형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치 잊었던 사실을 지금 기억해낸 것처럼.

“유산호 말인데,”

“…어. 걔 왜?”

“걔  걸레 같더라.”

“뭐?”

“스스로 엉덩이 벌리고 박아달라고 하던데. 허리도 잘 흔들고.”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지껄이는 박성경의 목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유산호가 박성경이랑 붙어먹었다고? 준형의 기분이 순식간에  같아졌다.

“네가 왜 계속 데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아.”

“…….”

“귀엽더라.”

그렇지 않아도 유산호는 갈수록 변하고 있었다. 준형은 그게 제 덕이라 생각했다. 묘한 색기가 농익어서 무른 복숭아즙처럼 질질 흘러 나와 사람을 자꾸 안달 나게 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조금만 만져도 알아서 다리를 벌리며 안겨 오는 게.

그러나 유산호는 자꾸 준형의 신경을 긁었다. 밤마다 물어뜯어 붉게 터진 입술과 대조적으로 파리해진 안색은 목련 같아서 준형은 자주 산호를 꺾고 싶었다. 그대로 꺾어서 제 방에 숨겨놓고 매일 밤새도록 혀로 핥고 싶었다. 멍이 잘 드는 산호의 몸은 대체로 희고 건조했으나 주무를 때마다 분홍빛으로 물드는 엉덩이 사이는 언제나 축축했다.

준형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걸 저만 알았다면 흡족했을 텐데. 그 사이에 박성경한테 매달렸다고. 산호는 자꾸 준형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준형은 왜 자기가 이렇게까지 분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준형은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야, 나 먼저 간다. 너네끼리 마셔.”

“…그래.”

성경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준형은 택시를 잡아타고 유산호의 집으로 향했다.

* * *

산호는 어쩐 일인지 저를 부르지 않은 준형 때문에 한껏 우울한 상태였다.

[오늘은 오지 마]

[왜? 무슨 일 있어?]

[ㄴㄴ애들이랑 넷이 보기로 함]

[알겠어. 재밌게 놀아]

낮에 그렇게 성의 없는 문자를 하고는 쭉 아무 연락이 없었다. 산호는 갑자기 조용해진 자신의 주변이 초조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웃고 있을 도준형이, 새삼 멀게 느껴졌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산호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도착한 곳은 학교였다. 갈 곳이 없었다. 요즘은 늘 준형의 집에만 갔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시작부터 잘못됐다. 산호는 준형에게 처음부터 쉬운 상대였다. 한번 땅을 파고든 생각은 멈추지 않고 산호를 괴롭혔다. 캠퍼스를 걷는 사람들 중에 산호 자신이 제일 불쌍한 것 같았다. 제가 한심한 탓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제 탓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모르겠다. 도준형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산호의 마음을 알면서 이용하는 도준형도 나쁘다. 아닌가. 나쁜가. 산호는 생각에 잠긴 채 하릴없이 걸었다. 도서관 건물을 지나 경영대 건물과 식당을 지나고 잔디밭을 빙 돌아 기숙사 건물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준형만으로도 복잡한 머릿속에 담배 연기를 뿜던 성경이 툭 끼어들었다. 금연 구역임에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던 성경이 떠오른 것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산호의 몸이 굳었다.

윤서영. 그 여자였다.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끼운 채 웃으면서 통화를 하는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걱정 마, 걱정 마. 잘 되면 언니가 거하게 한 턱 낸다. 아 근데 뭐 입고 가지? 어? 아니, 나 소개팅은 처음이라 모르겠네. …그럴까? 그래, 그럼,”

“저기요.”

여자의 입에서 소개팅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산호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야, 잠깐만. 누가 말 걸어서. …뭐야?”

“저 아시죠. 준형이 친구요.”

“…아, 저번에 봤던 그…. 근데 왜?”

“남친도 있는데 소개팅은 좀 아니지 않아요?”

“뭐라는 거야….”

“도준형은 그쪽한테….”

“뭐? 도준형이 그래? 내가 지 여친이라고?”

“…네?”

“그 새끼가 돌았나 진짜…. 별 거지 같은 소릴 다 듣네. 걔가 왜 내 남친이야. 롤토토 것도 창피한데. 재수 털리게 그 새낄 왜 나한테 갖다 붙여. 또 그딴 소리 하고 다니면 내 손에 뒤진다고 전해줘.”

“…그럼 준형이 여자 친구는….”

“너 걔 친구라며. 근데 걔 모쏠인 것도 몰라? …보아하니 친구랍시고 뜯어먹히기만 하는 관계 같은데.”

서영의 말에 산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서영이 의도한 뜻은 그게 아니겠지만 어쨌든 산호가 도준형에게 여기저기를 뜯어먹히는 건 맞았다. 산호가 당황한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자 서영은 담배를 담벼락에 비벼껐다.

“하여간 남자들은 한심해. 등신 취급받으면서도 왜 그러고 살지….”

서영은 산호가 들으란 듯 혼잣말을 뱉고 자리를 떴다. 산호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충격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서영이 남긴 말들이 산호의 마음을 사방에서 찔렀다. 산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계속해서 저 사람을 부러워했었다. 절대로 내 손에 잡혀주지 않던 도준형. 그런 도준형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해서 부러워하고 부러워하다, 졸렬한 질투에 혼자 눈물을 짜낸 밤이 손에 꼽을 수도 없었다. 언제나 도준형의 앞에서는 작아지는 저와 달리 서영은 당당해보였다. 그게 사랑을 가진 자의 여유라고 생각했는데. 산호는 어디든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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